
고려 말기, 왕조의 운명이 흔들리던 시기에도 굳건히 기존 질서를 수호하려 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정몽주입니다. 정몽주가 대표한 온건 개혁파의 정치 노선과 이상 그리고 충절이 어떻게 조선 건국 세력과 충돌하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격변기의 중심에서 정몽주는 단지 과거를 지키고 고수하려고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질서와 이상을 놓지 않으려 했던 ‘마지막 고려의 충신이자 유학자’였습니다.
1. 무너지는 왕조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의 등장
14세기 후반, 고려는 내우외환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라의 기강은 흔들렸고 권문세족의 전횡은 극에 달해 민생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이 시기에 일부 신진 사대부는 급진적 방식으로 새 시대를 준비하였지만 정몽주는 그와는 달리 점진적이고 합리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 개혁파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는 새로운 왕조의 창출이 아닌 고려라는 기틀 안에서 나라의 정의를 바로잡고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려 하였습니다. 정몽주는 성리학자로서 뛰어난 지식과 인품을 겸비한 인물이었으며 외교관으로서 원나라와 명나라 사이의 중재와 외교를 진두지휘하였습니다. 그의 정치 철학은 고려 왕조의 정통성과 유학적 충절 위에 놓여 있었으며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 신념을 넘어 고려 체제 자체를 지키기 위한 국가적 신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점차 격변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점진적 개혁보다는 단칼에 권력을 쥐려는 급진 세력이 부상하면서 정몽주의 온건주의 주장은 점차 배척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 건국 세력은 정몽주의 충절을 '방해 요인'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갈등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2. 정도전과의 충돌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갈등
정몽주가 속한 온건 개혁파는 현실적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면서 그 문제해결의 핵심에는 ‘충’과 ‘효’라는 유학의 가치가 중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 무인 세력도 유교를 표방하였으나, 그들이 추구한 것은 기존 체제의 철저한 해체와 새로운 나라 체제의 설립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극명하게 정몽주와 대립한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신권 중심의 정치체제를 구상하며 왕조 교체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는 왕조는 하늘이 아니라 백성의 뜻으로 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은 그 당시에는 급진적인 생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정몽주는 왕조의 정통성과 충절을 중시하며 어떤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두 사람의 정치적 사상 충돌은 단순한 권력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대 정신의 충돌이었고 한 사회가 어떠한 가치를 택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정몽주는 극단적 선택을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권력 투쟁이 아니라 신념의 고수였고 그것이 그를 운명적인 죽음으로 이르게 하였습니다. 정도전과의 갈등은 단순히 언쟁이나 의견 충돌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조선 건국을 둘러싼 정치적 긴장 속에서, 정몽주의 존재는 새로운 왕조 수립 세력에게 분명한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무력에 의한 제거라는 비극적 선택이 내려지게 됩니다. 이는 곧 선죽교의 비극으로 이어졌고, 정몽주는 역사 속에서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기억되게 됩니다.
3. 선죽교에 흐른 피, 지키지 못한 충절
1392년, 선죽교에서 정몽주는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에 의해 죽게됩니다. 그는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고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는 단심가를 남기며 자신의 마지막 뜻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이 한 줄의 시는 고려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그의 정신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정몽주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사건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왕조 성립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거해야만 했던 명분을 제공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켜냈고 후대에 이르러서는 ‘참된 충신’, ‘이념의 수호자’로 재평가받게 됩니다. 결국, 정몽주가 보여준 저항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신념과 철학은 현재에도 살아남아 있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그의 유학적 정신은 교육과 정치 사상의 바탕이 되었으며 한국 유교의 뿌리로 이어졌습니다. 정몽주의 삶은 우리에게 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혼란 속에서도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저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충절의 의미를 다시금 새기게 만드는 역사적 의미 및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