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 문벌 귀족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내부 균열과 정치적 충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입니다. 두 사건은 단순한 반란이나 정치적인 영향을 넘어 고려 정치 구조의 한계를 드러낸 동시에 지배층 내의 권력 투쟁, 사상 갈등, 지역주의 대립까지 아우르는 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중심으로 고려 중기 정치의 본질을 고찰하고자 합니다.
1. 문벌 귀족 체제의 균열, 정치적 갈등의 전조
고려 중기 때 문벌 귀족 사회는 중앙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으며 국정 운영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세습적인 관직 및 경제적 기반, 교육 기회의 독점을 통해 정치적 권력을 견고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점차 내부의 불균형을 초래하며 균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특정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면서 왕권과의 갈등이 발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이자겸의 난’입니다. 이자겸은 외척 세력을 등에 업고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로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들을 인종에게 시집보내며 왕실과의 혼맥을 강화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당시 인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정치 경험이 부족하였고, 이는 이자겸의 권력 독점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인종은 점차 이자겸의 권세를 경계하게 되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한 내부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자겸은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선제적으로 정변을 일으켜 왕을 폐위하려 하였으나, 궁중 내 반발과 군사력의 부족으로 실패하고 맙니다. 결국 1126년 이자겸의 난은 진압되었고, 그는 유배되어 몰락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문벌 귀족 내부의 권력 경쟁이 극단으로 치달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후 고려 정치는 더욱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자겸의 난은 단지 한 인물의 권력 투쟁을 넘어 문벌 귀족 체제의 균열과 왕권의 회복이라는 구조적 갈등의 단면이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의 여파 속에서 새롭게 부상한 사상과 지역주의적 흐름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입니다.
2.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사상과 지역의 충돌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이후, 고려 정치는 일시적으로 안정을 되찾는 듯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갈등이 잠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개경 중심의 문벌 귀족 세력과 서경을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 간의 지역적, 사상적 대립이었습니다. 이 대립은 단지 정치권력의 이동을 둘러싼 것이 아니라 동북 지역의 자주성, 민족주의적 사상, 유교와 도교·풍수지리 사상의 충돌까지 아우르는 복합적 양상을 보였습니다. 묘청은 서경(현재의 평양)에서 활동하던 승려이자 정치사상가로, 왕실의 보호를 받던 고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개경 중심의 귀족 정치를 비판하며, 서경을 고려의 새로운 수도로 삼자는 천도론을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은 단순한 행정 중심의 이전이 아니라, 민족적 자주성과 이상 국가 건설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추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조하며, 서경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재편을 통해 고려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묘청의 사상은 유교적 문벌 귀족 세력과는 매우 상반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풍수지리설, 도참신앙 등을 정치적 근거로 삼았고, 이를 통해 민심을 끌어모으려 하였습니다. 반면, 개경 중심의 문벌 귀족들은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결국 이 두 사상과 지역의 충돌은 1135년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라는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묘청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관료 및 무장들과 함께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려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서경 천도와 자주적 국가 운영을 내세웠지만, 중앙 정부는 이를 즉각 반란으로 규정하고 진압군을 파견합니다. 결국, 이 운동은 1년 만에 실패로 끝났으며, 묘청은 처형되고 서경 일대는 다시 중앙의 통제를 받게 됩니다. 묘청의 운동은 비록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이후 고려 사회에 깊은 변화를 남겼습니다. 자주성, 민족주의적 역사관, 중앙과 지방의 권력 균형 등 다양한 주제가 이 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고려 후기로 이어지는 신진 세력의 부상에 하나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3. 정치적 갈등에서 사상 투쟁으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각각 문벌 귀족 내부의 권력 투쟁과 지역·사상 간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지니며, 고려 중기 정치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이자겸의 난은 문벌 귀족 체제의 폐해와 왕권 회복의 필요성을 부각했고, 묘청의 운동은 중앙 정치에 대한 지방 세력의 불만과 자주적 정치 이념의 대두를 상징하였습니다. 두 사건 모두 단순한 반란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고려 정치 체제의 모순과 향후 개혁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무신정변으로 이어지는 고려 정치의 흐름은 바로 이 시기에 누적된 갈등과 구조적 긴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자겸과 묘청의 사례를 통해, 정치권력의 분산과 집중, 사상의 충돌이 국가 운영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자겸의 야망과 묘청의 이상은 결국 현실 정치의 벽 앞에서 좌절되었지만 그들이 남긴 영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권력은 누구의 것이며, 국가 운영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고려 중기의 이 두 사건은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으며 한국 정치사에 있어 가장 철학적인 갈등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