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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와 쇄국정책 속 자주를 지키려고 한 조선

by wshistory 2025.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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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관련 이미지

1871년 조선과 미국 사이에 발생한 군사 충돌인 ‘신미양요’는 서구 열강과의 두 번째 무력 접촉으로 조선이 본격적으로 세계 질서의 압박에 직면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조선이 외세의 위협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이었습니다. 신미양요의 배경과 전개 그리고, 조선이 취한 전략과 그 한계를 중심으로 당시 국제 질서 속 조선의 위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다시 닥쳐온 서양의 무력 외교

19세기 후반, 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 앞에 하나둘씩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1854년 미국과의 가나가와 조약을 통해 개항하였고 청나라도 아편전쟁 이후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며 반강제적으로 국제 질서에 편입되고 있었습니다. 반면, 조선은 여전히 자주적 질서를 유지하려 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이후 더욱 강경한 쇄국정책을 강화하며 ‘외부의 간섭은 곧 멸망’이라는 인식 아래 국문을 더욱 굳게 닫았습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의 눈에 조선은 여전히 열리지 않은 ‘극동의 마지막 미지의 땅’으로 비쳤습니다. 미국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보복을 명분으로 삼아 1871년 극동함대의 일부인 아시아 함대를 이끌고 조선 해안에 출현하게 됩니다. 이 군사적 접촉은 평화적인 통상 요구가 아닌 철저히 ‘군사력에 의한 외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곧, 강화도 인근에서 신미양요라는 무력 충돌로 이어지게 됩니다. 당시 조선은 근대식 군사 체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며 전통적인 화포와 목책, 인력 중심의 방어망으로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도 조선은 의연히 맞섰고 그것이야말로 이 전쟁의 핵심적인 역사적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2. 강화도에서 벌어진 전투, 조선의 항전 기록

미국은 1871년 5월, 로저스 제독의 지휘 아래 군함 5척과 해병대 1,200여 명을 이끌고 강화도 해역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들은 조선 조정에 통상 교섭을 요구하며 ‘조사 답변’을 요구했으나, 흥선대원군은 이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방어 체계 유지에 들어갔습니다. 미군은 곧장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를 향해 진격하였습니다. 이곳은 당시 조선 수군의 주요 요충지였으며, 수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이 결사항전의 자세로 끝까지 저항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어재연 장군은 당시 화승총과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지휘하며 근대식 화기를 앞세운 미군에 맞서 싸웠고 끝내 전사함으로써 ‘나라의 문을 지키다 산화한 상징적 인물’로 기록되었습니다. 전투 결과, 조선은 광성보를 포함한 주요 진지를 상실하였으나, 조정은 결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조선 조정이 요구를 거부하고 더 이상의 외교적 진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전리품과 전사자들을 수습한 뒤 철수하게 됩니다. 이때 미국이 가져간 유물 가운데는 조선 왕실 깃발이자 상징인 ‘수자기’가 있었고, 이는 약 139년 뒤인 2010년에야 대한민국에 반환됨으로써 그 역사적 굴욕이 되돌려졌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단순히 전투의 승패를 넘어 나라의 자존과 국제 외교의 현실을 체감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3. 신미양요의 역사적 의의

신미양요는 조선이 서구 제국주의와 직접 맞서 싸운 두 번째 군사적 충돌이었으며 이전의 병인양요보다 더 규모 있고 조직적인 대응이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은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거부로 자주적 입장을 끝까지 고수하였고 그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민족의 자존과 독립의 의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항전이 보여준 한계 또한 분명히 있습니다. 근대 군사력과 외교력의 부재, 폐쇄적 정치 시스템, 국제 정세에 대한 무지 그리고 무엇보다 근대화에 대한 준비 부족은 이후 조선이 일본과 서구 열강의 압박 속에서 점점 더 불리한 위치로 몰리게 되는 구조적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의 ‘척화’는 민족 감정상 지지받을 수 있었지만 나라 운영의 전략적 차원에서는 점차 실효성을 잃어갔습니다. 결국 조선은 1876년,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 체결을 통해 강제로 문을 열게 되고 그로부터 한 세대 뒤, 국권마저 잃는 참담한 미래를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미양요를 통해 조선이 꿋꿋이 싸웠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자주를 지키기 위해서는 문을 닫는 것이 아닌 실력을 갖추고 외교 전략을 정비하며 국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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