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6년, 조선은 천주교 탄압으로 일어난 ‘병인박해’와 이로 인한 프랑스의 무력 침공인 ‘병인양요’를 겪으며 본격적인 외세의 침투 국면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천주교에 대한 반감 그리고 당시 조선의 국제적 고립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외교·종교 충돌 사례였습니다. 병인박해의 배경과 과정, 병인양요의 전개와 그 결과를 중심으로 조선이 맞이한 첫 서구 무력 충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조선의 문을 두드린 서구 문명, 불신과 공포로 맞서다
19세기 중반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세도정치와 사회 구조의 붕괴, 외부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접근이라는 복합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가장 민감한 갈등 중 하나는 바로 ‘천주교’ 문제였습니다. 천주교는 18세기말부터 조선에 전래되어 일부 지식인과 민중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였으나 기존 유교 중심의 질서에 반하는 교리로 인해 지속적인 탄압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천주교는 제사를 거부하고 인간 평등과 하느님 중심 사상을 내세워 조선의 신분제 및 유교 윤리와 충돌하였습니다. 조정은 이를 단순한 종교 문제로 보지 않고 체제 전복의 위협으로 간주하였고 결국, 강경한 탄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866년, 당시 집권 중이던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단행합니다. 바로 병인박해라 불리는 사건으로, 수많은 조선 천주교인들과 함께 프랑스 선교사들도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베르뇌 주교를 포함한 프랑스 신부 9명이 순교당하였고 이는 프랑스 정부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조선 체제를 뒤흔들 ‘위험한 사상’으로 인식하였고 이러한 극단적인 대응은 곧 외교적 갈등 및 군사적 충돌로 확산시키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2. 병인양요의 발발과 조선의 항전
병인박해로 인해 자국 선교사들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프랑스는 즉각적인 군사 보복을 준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극동 함대를 지휘하던 로즈 제독은 조선에 대한 직접적 응징을 명령받고 1866년 10월, 군함 7척과 병력 약 600명을 이끌고 조선 해안에 상륙합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과 서구 열강 간 첫 무력 충돌인 병인양요입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공격의 목표로 삼고 손쉽게 강화도 외성인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하였습니다. 이어 강화부를 장악하고 외규장각을 비롯한 여러 관청과 사찰, 문화재들을 약탈하거나 불태웠습니다. 특히, 외규장각에서 프랑스군이 가져간 조선의 왕실 도서와 기록물들은 오늘날까지 반환을 둘러싼 국제적 이슈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조선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정족산성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의병들의 조직적 항전은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프랑스는 병력 보급과 기후 악화, 지역 주민의 비협조 등으로 인해 결국 장기전을 포기하고 약 한 달 만에 철수하게 됩니다. 이처럼, 병인양요는 프랑스의 군사 기술과 조선의 전통 방어 체계 간의 첫 격돌이었으며 조선은 외세에 대한 물리적 저항의 의지를 세계에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시 조선이 외교적으로 얼마나 고립되어 있었고 군사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는지를 드러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였습니다.
3. 병인양요의 역사적 교훈, 닫힌 문을 두드린 첫 외침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는 단지 종교 탄압과 군사 충돌이라는 사건을 넘어서 조선이 직면한 구조적 위기와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역사적 위기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내부의 혼란을 정비하고 자주적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강경한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을 선택하였지만 그 방식은 결과적으로 외세와의 충돌을 불러왔습니다. 프랑스는 무력시위를 통해 조선의 문을 열려하였고, 조선은 그 문을 더욱 단단히 걸어 잠그는 방식으로 대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일시적인 자주성은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르나 근대 국제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게 되어 조선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병인양요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더욱 강력한 쇄국 노선을 걷게 되었고 이는 훗날 운요호 사건(1875년)과 강화도 조약(1876년)으로 이어지는 불평등한 개항으로 연결됩니다. 결국, 병인양요는 조선이 근대 문명과 마주한 첫 번째 전투였으며 동시에 준비되지 않은 나라가 얼마나 쉽게 외압에 노출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문화와 사상이 충돌할 때 필요한 것은 무력만이 아니라 ‘소통과 이해’ 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국가가 내부 문제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외부 환경과 국제 질서를 제대로 인식하고 대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