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말기, 조선은 자주독립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열강의 제국주의 경쟁과 외교적 고립 속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습니다. 특히,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선 지배권 확보와 미국, 영국 등 주요 국가 속에서 조선은 점차 주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국권 피탈을 앞둔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와 열강의 이해관계 그리고 조선의 대응을 중심으로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혼자 싸운 작은 나라, 외교의 최전선에 서다
20세기 초, 대한제국은 자주 독립국을 자처하며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외교적으로는 열강과의 수교를 통해 국제 질서 속 자주국가로 인정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 국제 정세는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여 한반도를 자국의 생존 공간으로 간주하였고 러시아는 극동 진출을 가속화하며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였습니다. 이 두 열강의 충돌은 조선을 외교의 최전선이자 전쟁의 발화점으로 내몰았습니다. 대한제국은 이 틈바구니 속에서 중립 외교를 통해 자주를 지키려 하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계열강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였고, 조선의 독립은 그들의 외교 정책 속에서 협상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었습니다.
2. 러일전쟁과 외교적 고립, 국권 상실의 시작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와의 긴장 끝에 포츠머스 조약 체결 이전 조선 내 일본 공사관을 중심으로 병력을 투입하며 러일전쟁을 일으킵니다. 이 전쟁은 조선이 직접적인 전장이 아니었음에도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외교 사건으로 작용합니다. 전쟁 직후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게 합니다. 이 조약은 일본군이 조선 전역에서 군사적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사실상 조선의 주권 일부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후, 일본은 조선 내 친일 인사를 중심으로 행정부를 장악하고 황제의 외교권을 통제하며 내부 여론을 억압하기 시작합니다. 1905년에는 마침내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 완전히 넘어가게 되고, 조선은 ‘외교적 사망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일본은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열강과의 조율을 통해 조선 통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입니다. 이 밀약에서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였습니다. 또한, 영일동맹(1902년)은 일본이 조선에서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은 이 같은 국제 담합에 대응하기 위해 헤이그 특사(1907년)를 파견하여 국제사회에 일본의 침탈을 호소하려 하였으나, 열강은 이미 일본의 조선 지배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으며 대한제국의 외교는 끝내 단절되고 맙니다. 고종은 이를 막기 위해 국제사회의 중재를 시도하였고 내부 개혁을 가속화하며 저항하려 하였으나,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로 앉혀 명실상부한 조선 통치를 강화하게 됩니다.
3. 소리 없이 지워진 국경선, 그날의 외교를 돌아보다
국권 피탈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년에 걸친 국제 정세의 변화와 열강의 이익 다툼, 일본의 치밀한 외교 전략, 조선 정부의 분열과 대응 실패가 복합적으로 얽혀 일어난 국제적 합의 속의 강탈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국권을 지킬 수 없었으며, 세계는 조선의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을사늑약과 합병 조약은 그 자체로 불법적인 외교 문서였지만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대에서 정의는 침묵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극의 역사를 통해 자주 외교가 단지 선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강력한 내정 기반, 국민의 단결, 국제 사회 속의 전략적 연대가 뒷받침되어야 함을 배워야 합니다. 조용히, 그러나 치밀하게 침탈당한 조선의 주권. 그날의 외교적 실패는 오늘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권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역사적 교훈은 되새겨야 하겠습니다.